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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덕서 둥섭 마음 달랬지” 정릉 예술인의 삶을 더듬다

문화일보

▲  1952년 12월 부산 피란지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이중섭(왼쪽부터)과 박고석, 한묵. 부산의 인연이 서울로까지 이어져 1950년대 중반 서울에서 재회해 함께 생활한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성북구립미술관 ‘정릉시대’展 

박고석·한묵·박화성·박경리… 
화가·소설가 등 예술혼 불태워 
이중섭 세상 떠나기前 살던곳 
1950년대 예술인 터전 재조명

“둥섭이 이곳 정릉에 와서 처음에는 병색이 가시어지면서 근처 언덕길 산책도 하고 더러 스케치도 했었다.”(한묵)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인 이중섭(1916∼1956)은 6·25 전란 중에 박고석이 피란 가 살던 부산의 6평짜리 판잣집에 몸을 의탁하는 등 인연을 맺었다. 

이후 통영과 대구 생활을 거쳐 1955년 성베드로신경정신과병원(서울 성북구 돈암동 51-7번지)에서 치료를 받은 후 퇴원, 박고석(1917∼2002)과 한묵(1914∼2016)이 있었던 정릉으로 들어와 1955년 12월 중순부터 반 년간 머물렀다. 그 시절 한묵이 지켜본 이중섭의 모습이다. 

당시 이중섭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한묵과 삽화를 그렸다. 그처럼 어려운 시절에도 박고석과 한묵, 이중섭은 정릉을 본거지로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으로부터 아리랑고개의 목로주점까지 함께 어울려 다니며 호방하게 한 시대와 부딪쳐갔다. 

그러나 결국 병이 재발해 이중섭은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유골은 망우리에 묻혔고, 일부는 박고석에 의해 정릉 골짜기 어디쯤에 뿌려졌다. 

1950년대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은 상처투성이였고, 예술가들의 심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든 곳이 서울 성북구 정릉이었다.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이 기획전시 ‘정릉시대’ 전을 6월 24일까지 연다. 북한산 자락인 정릉에 거주했던 수많은 문화예술인의 삶과 예술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전시다. 전시에는 미술 분야의 박고석, 이중섭, 한묵, 정영렬(1934∼1988), 최만린(83), 문학의 박화성(1903∼1988), 박경리(1926∼2008), 신경림(82), 차범석(1924∼2006), 음악의 금수현(1919∼1992), 김대현(1917∼1985) 등 총 11명의 예술가가 참여하고 있다. 대부분 고인이지만 조각가 최만린과 시인 신경림은 아직도 정릉에서 살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이중섭의 ‘닭과 게’(왼쪽 사진)와 박고석의 ‘정릉골 풍경’(오른쪽). 이중섭 그림은 금수현의 곡 ‘꽃으로 그린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중섭미술관·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1950년대 정릉에 모인 화가, 문인, 음악가들은 서로에게 예술적 동지이자 벗 그 이상의 존재였다. 전시장에 걸린 이중섭의 ‘닭과 게’ 작품은 당시 그들의 교유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1954년 이중섭은 김상옥 시인 출판기념회에 초청을 받아 갔지만 빈손으로 가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그래서 방명록에 그려준 그림이 바로 ‘닭과 게’였다. 김상옥은 ‘닭과 게’ 그림을 보고 이듬해 ‘꽃으로 그린 악보’라는 시를 지었고, 여기에 금수현이 곡을 붙여 ‘꽃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그들이 사라진 정릉에서 이제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1980년대 이후 개발의 광풍이 정릉에도 몰아치며 온전하게 당시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집은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산국립공원 앞 청수장 인근 느티나무를 끼고 돌아드는 골목 어름이었다고 알려진 이중섭의 집은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렵다. 주소조차 확인이 안 되고 있다. 

그러면 당시 정릉의 모습은 어땠고 왜 그들은 정릉에 모여 피폐해진 마음을 달랬던 것일까. 

정릉은 성북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비교적 개발속도가 더디게 이어진 곳이었다. 좁고 고불고불한 골목길과 언덕들이 말해주듯이, 이곳은 계획도시처럼 획일화된 모습과는 무관하다. 특히 당시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안은 북한산의 한 자락이 걸쳐 있었으며 그로부터 청수(淸水)라 불릴 정도로 맑은 물이 흘렀다.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군상들의 삶을 서로 기대거나 포개며 살 만했다. 

이유선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척박했던 시기인 근현대사에서 민족정신이 예술로 꽃피고 한국적인 미의식이 탄생했던 터전으로서의 정릉을 조망해 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 문화일보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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